이글은 어느 작가가 올린 글을 옮겨온 글입니다.
2003. 8. 8.
삼가 문화인들에게 고하노니
1.굿이 살아야 문화가 산다
Performance (퍼포먼스)가 무엇입니까.
퍼포먼스는 삶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작금의 현실이 퍼포먼스가 굿을 표방하는데 이것은 가짜고 껍데기입니다.
굿은 민중들이 삶의 애환과 한을 풀고 객사하거나 돌연사한 망자의 넋을 달래는 것이며 공동체적 소망에 대한 축원입니다.
퍼포먼스가 유럽에서 자신들의 문화에서 필연적 요소를 안고 태어났다면 우리네 나라안에선 문화적 어용으로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성도 없고, 정신도 없고 그저 자신의 에고와 애착을 담아내는 것이 예술의 바름은 아닙니다. 거짓된 즉흥, 마치 서커스처럼 이상한 짓거리의 흉내일 뿐입니다.
저의 생각으론 이 땅위에 퍼포먼스란 말을 가급적 금하고 진실한 행위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하니, 이제 굿을 살려야 합니다.
조선말기, 일제시대를 거쳐 흑세무민하여 퇴행된 굿이 아닌 진정한 가슴으로 살아있는 굿이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퍼포먼스란 말을 버리고 우리의 굿을 되찾아야 하는 때라고 보입니다.
특히, 퍼포먼스란 단어자체에서 오는 거부감과 모호성이 악습적 문화병폐 현상을 야기한다고 봅니다. 작가나 혹은 일반인들에게도 이 행위의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논할 때마다' 나 아방가르드' 의 언저리를 헤매며 이유를 찾아보려 하지만 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잘못된 일입니까?
더구나 퍼포먼스가 지향하는 실험과 전위는 모든 예술에 근본적 요소이고 형태입니다. 뼈를 깍는 노력없이 허황되게 실험을 위한 실험은 무엇이고 전위를 위한
전위는 무엇입니까. -이는 곧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라 사려됩니다.
행위가 진실로써 가치가 발현된건 근대사에서 대표적으로 전태일 열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의 진실된 사랑과 부정에 항거하는 정신으로 자신을 불살라 버리는 희생적 행위야말로 참으로 행위입니다.
퍼포먼스란 혼탁한 개념의 확장으로 이제 모든 예술가들이 귄위적 상징으로 퍼포먼스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발악을 하며 죽어가는 민중들이 있어 세상은
아비규환입니다. 소위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고 지랄한다고 하였지요. 이제는 누구 누구 퍼포먼스 한다고 하며 실제적이고 실존적 발광의 행위를 허위적으로 취급하게
되버린 결과를 마음 속에 심게 되었습니다.
퍼포먼스는 삶의 행위이지 삶 자체는 아니며 살아가면서 절규할 수 밖에 없는 행위가 아닌 행위를 위한 행위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니, 나라안 문화를 살리는 애정으로 왜래어인 퍼포먼스를 죽이고 굿을 살려야 마땅하다 생각됩니다.
만인에게 삼가 고하노니 큰 힘을 실어주십시오.
하나. 굿판을 새롭게 벌리는 운동이 필요할 것이요.
둘. 허접한 퍼포먼스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괴이한 걸 쉽게 따르는 성질이 있어 이대로 가다간 백년안의 나라안 문화가 껍데기만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대동의 굿판을 열고 통일민족의 자주적 문화확립의 기틀을 닦아야 할 시기라 생각되옵니다.
-한민족 문화 살리기 2003.8 북한산 자락에서, 솔문
2.Performance 는 없다.
퍼포먼스는 과연 새로운 것인가? 퍼포먼스는 전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 퍼포먼스가 도입된 것은 일부 몰지각한 이론가들에 의해 들여오면서 번역상 오류가 생기고 그것의 재해석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지금의
퍼포먼스가 나타난 것입니다.
퍼포먼스는 결코 예술의 한 장르의 성격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과정을 지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퍼포먼스의 개념을 도출한 건 시인들 이였습니다. 술을 먹고 춤을 추고 놀면서 세상을 비판하는 시낭송을 크게 외쳐되는 행위에서 연유합니다.
결코 지금의 대중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미술의 행위적 관념으로의 발전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왜 그러한 오해가 생겨 작금의 현실에선 개나 소나 퍼포먼스를 행위한다
고 자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기존의 한국의 미술판이 썩어 있었기 때문에 그 액자구성의 틀을 견디지 못한 일부 미술학도 들이 연희사의 고찰도 없이 무책임한
자기발산으로 그 행위를 권위적이고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국민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인식하는 퍼포먼스는 옷을 벗고 기괴한 형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물감을 난사하고 이상한 걸 자꾸 집어먹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것이 자칫 예술가의 진지한 고뇌처럼 비칠 수도 있으나 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허위의식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실례로 예술가가 옷을 벗으면 예술이라 정당하고 일반인이 거리에서 옷을 벗으면 경범죄에 해당하는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행위가 순수했던 의도는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삶의 모든 행위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끌어안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몰지각한 작가군들에 의해 또다시 과거로 역행하는 과정으로 퍼포먼스를 가장 권위있는 예술의 자리에 등급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에게 충심으로 고하노니 한국에 퍼포먼스는 없습니다. 또 그러한 것이 따로 명명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수만년의 문화유산속에 어찌 퍼포먼스가 없었겠습니까. 가장 대중적인 퍼포먼스 작가인 무세중氏 역시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굿입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산에올라 괴상한 짓을 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 만해도 기후제를 드리는 우리네 당굴님들이 하던 행위였습니다.
이제 밝은 해안을 가지고 왜래어인 퍼포먼스의 그 모호성에 기인한 근거없고 이유없는 행위를 그만둡시다.
사실 그것은 연희 되어지는 하나의 극입니다. 연극은 고대시대부터 내려져 오는 인간의 문화활동인 것입니다.
퍼포먼스에선 하나의 새로움도 없습니다.
제례의식의 형식적 모방이요. 연극적 형태의 차용이요. 비일상의 정서적 행위인 무용을 흉내 냄으로써 시대착오적 역행입니다.
이에 거짓이고 껍데기인 퍼포먼스를 버리고 진정한 의미로서의 우리의 행위를 밝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날짓' 이거나 '날굿'입니다. 흐린날에 날구지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혼탁한 시대엔 날굿을 해야 합니다. 왜 날것이냐 하면 가공되지 않은 살아있는 행위로써 날 것 그대로의 짓거리이니 날것이며 펄펄 뛰어오르니 그것이 날개짓이고
이상의 세계로의 비상이니, 또한 그것이 축원이니 이는 곧 '날굿'입니다
다시 한번 아뢰오니 이제 이 땅에서 퍼포먼스를 묻어버리고 우리네 굿을 살려 그러한 삶의 애환이 불거져 튀어나올 때 우리는 옛사람과 같이 굿한다고 하고 푸닥거리
한다고 합시다.
이 말들은 백성의 말이고 살아있는 말이니 나라안 문맹의 국민도 그 뜻을 헤아려 짐작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바름이 아니겠습니까.
작금의 예술에서 실험을 거명하는 이들은 모두가 허위이고 어용문화의 선두주자입니다.
예술은 그 자체가 실험이고 전위입니다. 전위라 함은 가장 앞에서 내다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앉아서 천리를 보는 것이고 오늘 백년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입니다. 결코 남들이 하지 않는 괴이한 짓거리가 전위가 아닙니다. 실험도 마찬가지로 실험을 위한
실험이란 어불성설입니다. 실험은 삶에 필요한 어떠한 결과를 도출하여 보는 행위의 과정으로 과학자들이 그러하듯 실험은 그 연구의 목적에 따라 달라지고 세상에
드러나는 그 결과물에 의해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실험이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움 이라면 지금의 원폭 실험도 훌륭한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험이란 결과물을 도출해서 보여주는 것이 정석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전기를 발명한 사람들처럼 기관차를 발명한 사람들처럼 그러해야지요.
실험의 목적과 동기도 없이 실험을 위한 실험을 하는 사람들처럼 행위하고 있다면 저 라퓨타의 이상한 박사들처럼 괴이한지 않겠습니까.
이제 온 나라안에 고하노니 이 땅에 퍼포먼스는 없으니 겁먹지 마십시오, 혹여 퍼포먼스 한다고 여러분들네 집앞을 옷 벗고 서성이는 자가 있다면 똥바가지나 뿌려
버리십시오.
단언하건데, 위선적이고 허위적인 퍼포먼스 행위자들의 행위가 생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실존적 삶보다 가치 있을 수 없고 의미 있을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영혼은 바로 대중 일반 여러분들입니다.
-나라안 문화 바로잡기 2003.8 북한산 기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