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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을 장식하는 자살사건들... 자살이란 극단적 사건마저도 더이상 충격이 돼버리지 못하는 현대사회. 사회계층을 떠나 줄줄이 잇는 자살 사건을 보고 그저 눈시울이 시큰해질 뿐이다. "인간은 아름답다"는 말은 이제 한낱 말라 비틀어진 시체와 같이 돼버렸다. 세가지 죽음을 통해 한국이란 사회가 안고 있는 절망과 도덕적 위기감을 얘기해 본다.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우리 사회는 동방예의지국이니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니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나라로 전락하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그저 자본주의 물결속에 정치인들이 던지는 선진국이란 허울 좋은 도닥거림에 자신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도 모른체 살아왔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아름다운 영혼들이 자유롭게 춤추도록 깨어나야 한다.
죽음 하나. 인천의 한 어머니는(애석하게도 부모님 집과 가까운 곳임)자기 배로 낳은 자식을 던지고 자신도 몸을 던졌다. 비극이란 이런 것인가? 그들의 죽음 자체도 비극이지만 그 누구도 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산자의 위선으로 왈가불가하는 현실도 비극이다.
세상 어미의 마음처럼 넓은게 있을까?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게 어미다. 그런 어미가 제 자식을 해하려했을 때 그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산자의 어리석음이 더 빛날 때인가? 어미는 세상의 절망을 보고 말았을것이다. 아비가, 이웃이, 사회가, 정부가 남은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 줄 수 있을까? 아니다. 냉엄한 현실에 어미가 바라던 밀알 같은 희망은 없었을 것이다. 죽을 맘으로 살지....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말도 옛말일 뿐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일이 아닌것이다. 그누구도 이 어미에게 동정도 비난도 할 자격이 없다. 왜냐면 이런 절망을 만든 것은 시민이라는 우리 모두에 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돌아보자. 무심히 방조하고 방치하고 지나치는 일들이 매일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교양있는 시민을 자부한다. 절망은 이런 악의 없는 속에서 힘차게 자란것이다.
죽음 둘. 부대에서의 첫 공연의 흥분도 잠시 늦은 시간 전화 스피커가 울고 있다. 거는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스피커도 같이 울고 있는 것이다. '누구가 죽었단다" 그날 밤 나는 빈소 앞에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저 무심히 흘려 보내고 있었다. 27살 한창 젊은 나이고 열심히 산 후배를 볼 자신이 없었다. 사실 슬프지도 않았다. 어쩜 이미 난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썩 친하게 지낸 편도 아니고 후배에게도 난 그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주 가끔 그를 볼때면 그의 눈빛에서 늘 공허함을 읽곤 했다. 어둡고 탁하기까지 한 그 공허함 뒤엔 절망이 도사리고 있는듯 했다. "갑자기 밤섬에 가고 싶다고 물에 뛰어 들었어" "그리고 그게 끝이야" "8일만에 인천바다에서 발견되었데" ............................................. 내 옆에서 떠드는 낯선 사내에게서 역겨운 위선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했으면 그에게 가장 좋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지. 결국 후배는 절망으로 가득한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순수를 붙든 체 그렇게 갔다.
죽음 셋. 정몽헌 회장의 죽음. 작은 시민의 가슴부터 거물들의 철판같은 가슴까지 울려 가고 있다. 그가 죽을 이유가 있었을까? 경제적 압박? 정치적 압력? 비리에 대한 중압감? 우리같은 소시민의 이성으로는 마땅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
아버지로부터 추진해온 대북사업. 물론 배면의 이익도 충분히 계산했으리라. 그러나 다른 기업활동과는 달리 대북문제는 많은 정치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국내법으론 수용의 한계가 있어 그 사업의 속도와 강도에 많은 제약을 안고 있었다. 당장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이 아니며 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과제라는 큰 의의도 함께 한 사업이었다. 부실에 대한 정부의 계속되는 지원과 협력. 계산에 빠른 기업인으로서 이런 사업에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정회장은 분명한 어떤 소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부와 공생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은 바뀌고 시민들의 생각도 달라졌다. 어쩌면 한민족 정치사에 가장 주체적인 일이(타국의 간섭없는) 될 수도 있었을 사업에 한치의 포용보다는 날카로운 칼날로 눈 앞의 계산과 이익을 저울질 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해보자. 그 어떤 정치인도 해내지 못한 일에서 진정으로 이득을 본 자는 누구인가? 정치인들은 이제 제 다리마저 물어 뜯고 있다. 시민들마저도 그 아픔을 모른 체 동조하고 있다. 정몽헌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불행히도 그것이 절망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된다. 희망이란 씨앗에 제초제 같은 정치권, 시민들의 의식, 그리고 한배를 탔던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아득한 절망은 있었을 것이다.
셋의 죽음 사이에는 공통적으로 절망이 함께 하고 있다. 고통스러워도 웃을 수 있었고, 다 잃어버려도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신용평가제도가 물질적 기준만으로 등급을 매겨 악용되고 있는 디지털의 현실. (빛이 좀 있다는 이유로 취업이 거부되고. 전화요금 연체 사실마저 꼬치꼬치 캐묻는 현실) 이것이 절망의 시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미 수 많은 죽음은 절망의 그림자 속에 잉태돼 있다.
세가지 죽음은 이미 개인을 넘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한국민의 도덕성의 문제이다. 절망과 위태로운 도덕적 위기감.
우리가 깨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옛날 운동가를 부를때는 그래도 큰 희망이 있었는데....
돌아가신 분들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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